220502 이슈토론문 : 2022년, 5.18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1. 이슈토론문 기획 의도
- 1980년 이후 광주는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상징이 되었다. 매년 5월이 되면 광주에서는 ‘5.18’을 잊지 않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기념행사를 진행한다. 대학생들 역시 각자 학회, 교지 등에서 5.18을 학습하고 광주 정신을 고민한다. 42주년을 맞이한 2022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기억하고 계승해야 하는 5.18은 무엇인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본 이슈토론문을 준비했다.
- 구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1996년 제정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하 5.18 특별법)의 내용을 통해 국가가 정의하는 ‘5.18’을 확인한다. 둘째, 최근 2020년에 개정된 내용을 통해 국가가 5.18의 허위 사실 유포를 법적으로 처벌하게 되었음을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셋째, 5.18 특별법과 다르게 5.18을 해석하는 시각 중 하나를 소개한다.
2.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1) 추진 배경
- 핵심적인 추진 배경은 12.12 사태와 5.18의 핵심 인물인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사법적으로 처벌하기 위함이다. 당시 김영상 대통령은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에게 수많은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당사자들을 반드시 처리하기 위해 5.18특별법제정이 필요하다”며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한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했다. 당시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5.18은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했던 김 대통령이 갑자기 5.18 특별법 제정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이에 김대중 총재는 김 대통령의 입장선회가 대선자금 의혹을 희석시키기 위한 국면전환카드라고 규정하고, 김 대통령의 사과와 대선자금 공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김종필총재도 이에 적극 동조했다.
-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국가가 ‘5.18’을 공식적으로 정의하게 된다.
(2) 5.18 특별법 주요 내용
해당 법안은 ‘5.18’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 해당 법안은 ‘5.18’을 1979년 12월 12일과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형법상 내란죄, 반란죄 등)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전개한 민주화운동으로 정의한다.(2020년 개정 전에는 ‘민주화운동’으로만 명시) 이 법에서 “반인도적 범죄”란 제1항에 따른 기간 동안 국가 또는 단체ㆍ기관(이에 속한 사람을 포함한다)의 민간인에 대한 살해, 상해, 감금, 고문, 강간, 강제추행, 폭행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5.18은 ‘사회 불만 세력의 폭동’과 ‘공산주의자의 내란’이란 오해를 벗고 ‘민주화운동’으로 공식화,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핵심으로 인식된다.
5‧18민주화운동의 성격 [5.18기념재단]
1980년 5월 18일, 한반도 서남단의 아름다운 도시 광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토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본분을 어기고 동족인 시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장을 하고 폭력적인 군부집단에 맞서서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생략) 이 사건은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한 이후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일부 장성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자행한 군사반란(쿠데타)의 연장이었다. 이 군인 집단은 1979년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정부 기능을 정지시키는 등 국가 권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이 여기에 항거하면서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불법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 이 군인 집단은 나중에 박정희 군부독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신군부’라 불렸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정권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다.
신군부의 정권 찬탈 행위에 당당히 맞선 이 열흘간의 항쟁은 오늘날 ‘5‧18민주화운동’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렇게 명예를 회복하기까지는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들어선 5공화국 정부는 이 항쟁을 ‘사회 불만 세력의 폭동’과 ‘공산주의자의 내란’으로 규정했고, 신군부가 일으킨 내란과 반란 행위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주역들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생략)
5‧18민주화운동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국내외의 많은 정치학자와 역사가들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1980년 5월 18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5‧18민주화운동은 현대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독재 저항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운동이었다. 1961년에 군사쿠데타를 통하여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한 군부독재 세력에 저항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으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의 시민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1960년의 4‧19혁명,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7년의 6월항쟁, 2016~17년 촛불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둘째, 5‧18민주화운동은 군부집단을 주권자인 시민의 통제 하에 두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1987년의 시민항쟁을 통해서 헌법을 개정하고 주권자인 시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나, 그 후로도 한동안 정치 세력화된 군부집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집단을 재판에 회부하고 군부 세력의 정치 개입을 막을 수 있는 인적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생략)
- 2020년에는 5.18 특별법에 ‘허위사실 유포 금지’ 조항이 추가된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은 ‘역사 왜곡을 막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립하며 가짜뉴스를 차단해 유공자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해’ 개정안을 발의, 21대 국회에서 통과한다.
5.18 왜곡 처벌법, 21대 국회선 통과될까…"진실 지켜야" vs "표현 자유 위축“ [아시아경제, 20-05-18]
17일 민주당 광주·전남 지역 국회의원 당선인 18인은 보도자료를 내고 "21대 국회 개원 즉시 5.18 관련법 개정을 공동으로 추진, 20대에서 이루지 못한 과제를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당선인들이 공동 발의할 예정인 5.18 관련법은 이른바 '5.18 역사 바로 세우기 8법'으로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역할 및 권한 확대 △역사 왜곡 처벌 강화 △유공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 내용을 담고 있다. 당선인들은 이 가운데 왜곡 폄훼 발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5.18 왜곡처벌법'을 가장 먼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5.18 왜곡 처벌법 찬성 측은 5.18의 역사적 합의가 이미 이뤄졌는데도, 이를 부인하거나 비방하는 이들을 처벌할 법안이 없어 5.18 관련 가짜뉴스를 차단하거나 유공자 명예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현행법에는 5.18 망언을 처벌하는 형법 규정은 없다. 이 때문에 5.18 관련 단체들은 명예훼손 소송을 통해 5.18 망언을 한 이들을 일일이 고소하고 있다. 문제는 피해 대상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으면 명예훼손 처벌이 힘들다는 데 있다.
지난 2008년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해 명예훼손으로 피소된 지만원 씨는 4년 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지 씨가 5.18을 왜곡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았다"며 "5.18 민주화운동은 법적·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로, 지 씨 게시글을 통해 5.18 관련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판시했다.
이에 대해 지난해 5.18 왜곡 처벌법을 발의했던 박광온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2월20일 국회 회의실에서 열린 정책의원총회에서 "명예훼손 여부를 불문하고 금지 및 처벌을 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며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고 국민들이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5·18 왜곡 처벌법’ 본회의 통과…최고 징역 5년 [동아일보, 20-12-09]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이날 열린 21대 첫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재석 225명 중 찬성 174명, 반대 31명, 기권 20명으로 가결됐다. 개정안은 5·18민주화운동을 부인·비방·왜곡·날조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출판물, 전시물, 공연물 상영뿐만 아니라 토론회와 가두연설 등이 법안 적용 대상이다.
당초 개정안은 ‘징역 7년 또는 7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정했으나 상임위 논의 과정에서 완화됐다. 아울러 개정안은 ‘5·18민주화운동’을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라고 명문화 했다. 반인도적 범죄는 국제형사범죄법에 따라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
3. 5.18 허위사실 유포 금지 조항 추가에 대한 비판
먼저,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명예훼손죄 등 기존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기 때문에 과잉입법이란 비판이 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비판으로 법 자체가 ‘비민주적’이며 논쟁과 역사적 해석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이 있다. 해당 조항은 국가가 정의한 역사적 사실과 범위를 정해놓은 뒤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처벌한다는 것으로, 역사적 해석은 학계의 토론과 검증, 시민사회의 자정 기능에 맡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비판으로 해당 조항이 국가보안법을 떠오르게 한다는 비판이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성할 허위사실을 날조하거나 유포한 자를 처벌'하겠다는 국가보안법에 맞서 정치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옹호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회복을 위한 투쟁이 5.18 운동이었는데 5.18 특별법의 허위 사실 유포 조항 자체가 국가보안법의 논리와 똑같으며 5.18 정신을 훼손한다는 주장이다.
[사설] 5·18 왜곡 처벌 특별법, 표현의 자유 침해 소지 크다 [중앙일보, 20-10-29]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획을 그은 5·18의 역사적 의미는 우리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재평가돼 왔다.(생략) 관련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명예훼손죄 등 기존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이번 정기국회 내에 5·18 특별법을 통과시킬 방침이다. 야당이 반대할 경우 단독으로 강행할 의사도 내비쳤다. 5·18을 앞세워 역사 해석을 독점하겠다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고질적 편 가르기도 걱정된다. 박근혜 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초래한 사회 전반의 후폭풍을 벌써 망각했는지 의심케 할 정도다. 특히 이번에는 ‘정부의 발표·조사를 통해 명백한 사실로 확인된 부분’에 대해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여당은 가짜뉴스 엄단을 표방하지만 학문·예술·언론 행위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5·18 왜곡 특별법은 지난 20대 국회 때도 발의됐다가 위헌 논란 등으로 폐기됐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학계의 토론과 검증, 시민사회의 자정 기능에 맡기는 게 마땅하다.
[단독]"5·18은 끝났다" 5·18 겪은 철학자의 '5·18법 저격시' [중앙일보, 20-12-11]
“지금 나는 5.18을 저주하고 5.18을 모욕한다. 그 잘난 5.18들은 5.18이 아니었다. 나는 속았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11일 페이스북 게시글에 올린 시 ‘나는 5.18을 왜곡한다’의 내용 중 일부다. 그는 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5.18역사왜곡처벌법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시를 썼다. 최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자기 확신에 도취돼 역사 퇴행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법안”이라며 “5.18역사왜곡처벌법을 넘어 그 연장선상에서 전체주의적 독재의 길을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21살의 나이로 5.18민주화운동을 겪었다.
최 교수는 시를 통해 5.18역사왜곡처벌법을 처리한 민주당을 5·18에 비유해 “5.18아 배불리 먹고 최소 20년은 권세를 누리거라. 부귀영화에 빠지거라. 민주고 자유고 다 헛소리가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안을 비판하는 문구로 시를 끝맺었다. “5.18역사왜곡처벌법에 21살의 내 5.18은 뺏기기 싫어.”
최 교수는 5·18역사왜곡처벌법에 대해 “토론과 대화를 제약하는 법안이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매우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법안”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독재의 길을 닮아가고 있다. 시를 통해 5.18이 전두환을 닮을 줄 몰랐다고 표현했단 게 이런 의미”라고 말했다.
5.18 역사왜곡처벌법, 국가보안법을 소환하다 [프레시안, 20-12-12]
민주당은 5.18 역사왜곡처벌법 제정의 이유로 '잘못된 역사인식의 전파와 국론분열의 방지'를 들고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유들이다. 국가가 전면에 나서 '다른 역사인식'을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규정하고 이를 국론을 분열시키는 사회해악적인 범죄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법이 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이후, 보수세력은 천안함 사건이나 6.25 왜곡에 대해서도 처벌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한국사회에는 이와 유사한 법률이 이미 있다. 국가보안법이다. 과거사나 역사인식을 직접 규율하는 법률은 아니지만, 북한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에 '다른 인식'을 퍼뜨릴 시에는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로 처벌해왔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5.18의 역사적 진실과 국가폭력의 문제를 한국사회에 알리는 과정 자체가 국가보안법과의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성할 허위사실을 날조하거나 유포한 자를 처벌'하겠다는 국가보안법에 맞서 정치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옹호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회복을 위한 투쟁이 5.18 운동이었다. 그런데 5.18에 대해 부인, 비방할 경우 형사처벌을 하겠다는, 국가보안법과 동일한 논리구조를 지닌 법이 5.18의 이름으로 제정되려는 것이다. “역사왜곡이 아이들 역사관 형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나라의 정체성을 흔드는 정신적 내란죄”라며 5.18 역사왜곡처벌법을 옹호하는 민주당 양향자 의원의 발언에 참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5.18 역사왜곡처벌법에 대한 비판을 찾기 쉽지 않은 이유는 지난해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5.18 망언과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과의 결탁이 준 충격과 함께, 5.18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부터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지던 5.18에 대한 왜곡과 혐오가 주요 정당의 국회의원을 통해 공언되고 학살 책임자 전두환이 회고록을 출간해 이를 반복하는 상황은 5.18 피해자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폭력이다. 이러한 상황은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에게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총선과 겹친 세월호 추모 시기가 되면 후보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세월호 피해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쏟아냈다.(생략)
5.18,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부인과 왜곡,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행위가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회복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18은 90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법률'부터 시작해 전두환, 노태우 처벌, 국가유공자 예우, 국가기념일 지정까지 이루어졌지만, 법률에 근거해 조사권한을 부여받은 진상규명 조사위는 2020년에야 겨우 출범했다. 5.18에 대한 국가 차원의 포괄적인 진상규명보고서조차 없는 것이다.(생략)
이번 정기국회 상임위에서 40년 만에 구성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기간을 연장하고, 조사범위도 확대하는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지난 20대 국회 때 개정된 과거사법에 따라 '2기 과거사위'도 새롭게 출범하여 일제강점기 이후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조사를 추가로 할 예정이다. 너무나 오래 지연되고 지체되어왔다. 그 시간만큼 피해자들은 차별과 혐오에 고통받아왔다. 이번 진상규명은 과거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한국사회의 준거점을 만드는 소중한 작업이 되어야 하며, 진상규명의 목적이 형사처벌의 정당성 확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상규명보다 형사처벌을 앞세우는 5.18 역사왜곡처벌법은 당장 폐기되어야 한다.
4. 논의 요청
- 5.18 특별법이 해석하는 ‘5.18’의 의의(반독재 저항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민주화운동이자 한국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역사적 전기 마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 ‘5.18 왜곡 처벌법’을 찬성하는 이들은 역사 왜곡을 막고 올바른 역사 인식을 확립하며 가짜뉴스를 차단해 유공자의 명예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허위 사실 유포 조항은 국가가 역사 해석을 독점한다는 점에서 부적절하며 정치 사상과 비판의 자유를 억압한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각각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5. 5.18을 보는 다른 시각
- 이번 이슈토론문에서는 5.18 특별법의 허위 사실 유포 조항이 국가의 역사 해석 독점이란 비판에 주목한다. 분명 5.18 특별법의 시각과는 다른 방식으로 5·18에 의의를 부여하는 시각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본 파트에서는 그러한 시각들 중 5.18을 ‘신자유주의에 대한 최초의 투쟁’으로 평가하는 시각을 윤소영 교수의 『일반화된 마르크스주의 개론』을 참고하여 소개한다.
-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보는 시각과의 쟁점은 결국 12·12 사태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에 대한 평가다. 신군부가 박정희 정부의 ‘독재적’ 성격을 계승한 것을 핵심으로 보는지, 아니면 ‘신자유주의적’ 성격을 계승한 것이 핵심으로 보는지에 따라 한국 역사에서 5.18의 핵심 의의를 무엇으로 두는지도 달라진다. 독재적 성격 계승을 핵심으로 본다면 반독재·민주화운동으로, 신자유주의적 성격 계승을 핵심으로 본다면 반신자유주의 투쟁으로 의미부여할 수 있다. 물론 후자로 의미부여한다고 하여 민주화운동 측면으로서 5.18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 윤소영 교수에 따르면,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80년대였고, 이를 여는 상징적인 사건은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이다. 윤소영 교수는 1980년대의 경험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주항쟁의 성격에 대해서 재고해볼 필요가 있음을 제기한다. 이를 위해 박정희 시대부터 시작하여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다.
① 5·18의 시대적 배경
- 박정희 시기 한국 경제
-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통해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는 ‘발전주의’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루려 했다. 그 구체적 형태는 외국자본에 의존하는 수출지향적 산업화다. 당시 정부는 수출육성을 위해 기업의 수출규모에 비례하여 차등적으로 부채를 제공했다. 이로 인해 수익을 늘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많은 저금리의 부채를 확보를 목표로 하는 경영방식이 일반화된다. 당시 발전주의는 정부의 수출기업 지원뿐만 아니라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통해 가능했다.
- 1970년대에 들어와 박정희 정부는 외자의존적·수출지향적 산업화와는 별도로 재벌중심적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한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정부의 발전주의는 위기에 봉착했는데, 재벌중심적인 중화학공업화가 수익성 악화로 귀결되며 경제위기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 중화학공업으로 인해 무역수지 적자가 발생하며 외채가 더욱 누적됐고, 당시 국제경제에서 3高(이자율, 달러 가치, 유가) 현상이 발생하면서 외채누적이 외채위기로 폭발했다.
- 1979년 기존의 발전주의가 더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상황에 이르자, 4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으로의 이행 시도가 나타났다.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은 미시경제적 구조조정을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거시경제적 안정화(물가안정)를 시도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안정화 자체가 한국경제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다.
- 박정희 시기 노동자민중의 삶과 저항
- 1960-70년대 박정희 정부는 국제 경쟁력을 명분으로 강력한 저임금·저곡가 정책을 펼쳤다. 당시 한국 기업들이 국제시장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저렴한 가격뿐이었다. 생산가격을 줄이기 위해 기업이 선택한 손쉬운 방법은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덜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밥은 먹어야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싼 가격에 곡식을 팔도록 강요한다. 이로 인해 경제가 성장했음에도 노동자 농민은 최소한의 권리도 누릴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진다. 근로기준법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을 시작으로 도시에서는 정부의 억압적 통치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농촌에서는 정부의 저곡가 정책으로 피해를 보던 농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정부는 유신을 통해 이들의 정치적 불만을 억누른다.
- 1970년대 한층 심화된 한국경제의 위기는 1979년 2차 석유파동으로 폭발한다. 수출이 둔화되고 경제성장률은 폭락한다. 이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대표적인 것이 YH무역사건과 부마항쟁이다. 70년대 한국 최대의 가발수출업체로 부상하였던 YH무역은 70년대 중반부터 수출둔화와 업주의 방만한 자금유용, 무리한 기업 확장 등으로 심각한 경영난을 겪는다. 1979년 8월 YH무역은 폐업을 통해 위기를 무마하려고 한다. 당시 수출로 먹고 살던 대부분의 국내기업들이 이와 같이 대거 도산의 위기에 처해 있었기에 YH무역의 문제는 비단 한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YH무역 노동조합원들은 회사 정상화와 노동자의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고 사회적 주목을 받는다. 박정희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노동조합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한다.
- 부마항쟁의 경우 그 당시 경남 남해안 지역이 겪었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주목해야 한다. 1979년 발전주의에서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창원에서 마산과 부산으로 이어지는 경남 남해안 지역에서 최초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의 압력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중화학공업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창원의 군수산업은 수익성이 없었고, 이는 일차적인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경남 남해안 지역의 민중들은 경제적 피해를 봐야 했다. 이런 점에서 부마항쟁은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으로서 박정희 정부에 대한 저항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간에)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에 대한 최초의 투쟁이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② 5·18까지의 과정
- YH 무역사건과 부마항쟁 등 전국적인 투쟁을 진압하는 방식을 두고 집권세력 내부에서 갈등이 나타났고, 이는 10·26 사태로 이어진다. 이후 12·12 사태로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1980년 5월이 되면 이들이 군사 독재를 이어가려 한다는 것이 공공연해진다. 이에 대항하여 서울과 광주를 비롯한 지방 주요 도시들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서울의 경우 5월 15일 대학생들이 서울역 앞에서 약 10만 명 규모의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공수부대가 투입된다는 소문이 돌자, 시위 지도부는 충돌이 벌어질 경우에 발생할 대규모의 유혈 사태를 우려해 시위대를 해산시킨다(이른바 ‘서울역 회군’).
- 그러나 광주의 민중들은 끝까지 항쟁을 이어갔다. 신군부의 5·17비상계엄확대조치에 반대하여 5·18에 전남대 정문 앞으로 대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벌였고, 여기에 시민들이 합류하여 광주항쟁이 발발한다. 광주에서의 항쟁은 27일 새벽 공수부대가 밀고 들어와 전남도청을 함락시키기까지 열흘간 진행됐다.
③ 5·18, 어떻게 볼 것인가?
- 5·18의 성격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신군부를 어떻게 규정하고, 또 비판할 것인지의 내용이 중요하다. 윤소영 교수에 따르면, 신군부는 박정희 정부의 발전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계승했고, 안정화뿐만 아니라 구조조정까지 추진했다. 구조조정의 핵심은 울산과 포항의 중화학공업에서 수출지향적 성격을 강화하고, 창원에 있던 군수산업적 성격의 기계공업도 수출지향적 성격의 민수산업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신군부의 사명이 박정희 정부 말기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을 완수하는 것이었다면, 부마항쟁을 계승하는 광주항쟁도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에 대한 최초의 항쟁으로 볼 수 있다.
- 요약하면,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단초는 이미 1980년대에 출현했고, 바로 부마항쟁과 광주항쟁이 그런 신자유주의에 대한 최초의 투쟁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독재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의 성격 역시 배제할 수 없다) 광주에서의 항쟁은 당시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1980년대의 지식인운동이 노동자운동과 결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1980년대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할 수 있었다.
- 결국 앞서 제기한 쟁점, 신군부를 어떻게 평가하고 비판할 것인지는 해당 사건의 역사적 의미 해석과도 연결된다. 5·18을 민주화운동으로만 보는 시각은, 신군부를 박정희 정권을 계승하는 반민주 독재세력으로 인식한다. 이 경우 광주 민중들의 항쟁은 신군부에 항거한 민주화운동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종합한 정세, 그리고 신군부가 추진하고자 했던 구체 정책을 봤을 때 광주 민중항쟁의 성격을 단순히 반독재로만 보기 어렵다. 오히려 광주 민중들이 인식했든 인식하지 못했든 신군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에 맞선 최초의 투쟁 중 하나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억압적인 독재 정치를 넘어 수십 년간 쌓인 한국 경제의 모순에 대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 본 이슈토론문에서는 신군부를 독재 세력이자 신자유주의 세력이라고 규정했다. 다만 신군부 세력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평가는 담지 않았다. 신군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해석은 한국 경제의 문제를 무엇으로 보느냐와도 연결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신군부 평가는 추후 세미나 개최, 이슈토론문 발간 등을 통해 보충할 계획이다.
6. 논의 요청
- ‘5.18’을 신군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에 맞선 투쟁이란 관점은 기존에 5.18을 인식하는 관점과 비교했을 때 무엇을 더 고민하고 주목하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 2022년의 대학생들은 1980년 5.18을 어떻게 인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대학생들이 계승해야 하는 5.18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20502 이슈토론문 : 2022년, 5.18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1. 이슈토론문 기획 의도
2.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1) 추진 배경
(2) 5.18 특별법 주요 내용
해당 법안은 ‘5.18’을 무엇이라고 정의하는가?
5‧18민주화운동의 성격 [5.18기념재단]
1980년 5월 18일, 한반도 서남단의 아름다운 도시 광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토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본분을 어기고 동족인 시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장을 하고 폭력적인 군부집단에 맞서서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생략) 이 사건은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한 이후 권력의 공백기를 틈타서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일부 장성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서 자행한 군사반란(쿠데타)의 연장이었다. 이 군인 집단은 1979년 12월 12일에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1980년 5월 17일에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정부 기능을 정지시키는 등 국가 권력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이 여기에 항거하면서 좌절될 위기에 처하자 불법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한 것이다. 이 군인 집단은 나중에 박정희 군부독재의 유산을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신군부’라 불렸는데, 이렇게 해서 탄생한 정권이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다.
신군부의 정권 찬탈 행위에 당당히 맞선 이 열흘간의 항쟁은 오늘날 ‘5‧18민주화운동’으로 불리고 있으나, 이렇게 명예를 회복하기까지는 기나긴 인고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했다. 무고한 광주 시민들을 학살하고 들어선 5공화국 정부는 이 항쟁을 ‘사회 불만 세력의 폭동’과 ‘공산주의자의 내란’으로 규정했고, 신군부가 일으킨 내란과 반란 행위에 용감하게 저항했던 항쟁의 주역들은 죄인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생략)
5‧18민주화운동은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현대사의 분수령을 이룬 정치적 사건이었다. 그래서 국내외의 많은 정치학자와 역사가들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현대사는 1980년 5월 18일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진다고 평가할 정도이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지만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5‧18민주화운동은 현대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반독재 저항의 전통을 계승‧발전시킨 운동이었다. 1961년에 군사쿠데타를 통하여 18년 동안 대한민국을 통치한 군부독재 세력에 저항한 시민 불복종 운동이었으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의 시민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1960년의 4‧19혁명, 1979년 부마민주항쟁, 1987년의 6월항쟁, 2016~17년 촛불혁명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다.
둘째, 5‧18민주화운동은 군부집단을 주권자인 시민의 통제 하에 두면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우리나라가 비록 1987년의 시민항쟁을 통해서 헌법을 개정하고 주권자인 시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였으나, 그 후로도 한동안 정치 세력화된 군부집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그러나 광주에서 시민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전두환‧노태우 신군부 집단을 재판에 회부하고 군부 세력의 정치 개입을 막을 수 있는 인적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생략)
5.18 왜곡 처벌법, 21대 국회선 통과될까…"진실 지켜야" vs "표현 자유 위축“ [아시아경제, 20-05-18]
17일 민주당 광주·전남 지역 국회의원 당선인 18인은 보도자료를 내고 "21대 국회 개원 즉시 5.18 관련법 개정을 공동으로 추진, 20대에서 이루지 못한 과제를 반드시 완수하겠다"고 밝혔다. 당선인들이 공동 발의할 예정인 5.18 관련법은 이른바 '5.18 역사 바로 세우기 8법'으로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역할 및 권한 확대 △역사 왜곡 처벌 강화 △유공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 내용을 담고 있다. 당선인들은 이 가운데 왜곡 폄훼 발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5.18 왜곡처벌법'을 가장 먼저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5.18 왜곡 처벌법 찬성 측은 5.18의 역사적 합의가 이미 이뤄졌는데도, 이를 부인하거나 비방하는 이들을 처벌할 법안이 없어 5.18 관련 가짜뉴스를 차단하거나 유공자 명예를 보호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현행법에는 5.18 망언을 처벌하는 형법 규정은 없다. 이 때문에 5.18 관련 단체들은 명예훼손 소송을 통해 5.18 망언을 한 이들을 일일이 고소하고 있다. 문제는 피해 대상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으면 명예훼손 처벌이 힘들다는 데 있다.
지난 2008년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해 명예훼손으로 피소된 지만원 씨는 4년 뒤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지 씨가 5.18을 왜곡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구체적인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았다"며 "5.18 민주화운동은 법적·역사적 평가가 확립된 상태로, 지 씨 게시글을 통해 5.18 관련자에 대한 사회적 평가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다고 보기 어렵다" 판시했다.
이에 대해 지난해 5.18 왜곡 처벌법을 발의했던 박광온 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2월20일 국회 회의실에서 열린 정책의원총회에서 "명예훼손 여부를 불문하고 금지 및 처벌을 하는 규정을 마련해야 한다"며 "역사적 진실이 왜곡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고 국민들이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입법 취지를 설명했다.
‘5·18 왜곡 처벌법’ 본회의 통과…최고 징역 5년 [동아일보, 20-12-09]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은 이날 열린 21대 첫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재석 225명 중 찬성 174명, 반대 31명, 기권 20명으로 가결됐다. 개정안은 5·18민주화운동을 부인·비방·왜곡·날조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했다. 출판물, 전시물, 공연물 상영뿐만 아니라 토론회와 가두연설 등이 법안 적용 대상이다.
당초 개정안은 ‘징역 7년 또는 70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정했으나 상임위 논의 과정에서 완화됐다. 아울러 개정안은 ‘5·18민주화운동’을 ‘헌정질서 파괴범죄와 반인도적 범죄에 대항하여 시민들이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라고 명문화 했다. 반인도적 범죄는 국제형사범죄법에 따라 공소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
3. 5.18 허위사실 유포 금지 조항 추가에 대한 비판
먼저,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명예훼손죄 등 기존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기 때문에 과잉입법이란 비판이 있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비판으로 법 자체가 ‘비민주적’이며 논쟁과 역사적 해석을 가로막는다는 비판이 있다. 해당 조항은 국가가 정의한 역사적 사실과 범위를 정해놓은 뒤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처벌한다는 것으로, 역사적 해석은 학계의 토론과 검증, 시민사회의 자정 기능에 맡겨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비슷한 비판으로 해당 조항이 국가보안법을 떠오르게 한다는 비판이 있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성할 허위사실을 날조하거나 유포한 자를 처벌'하겠다는 국가보안법에 맞서 정치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옹호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회복을 위한 투쟁이 5.18 운동이었는데 5.18 특별법의 허위 사실 유포 조항 자체가 국가보안법의 논리와 똑같으며 5.18 정신을 훼손한다는 주장이다.
[사설] 5·18 왜곡 처벌 특별법, 표현의 자유 침해 소지 크다 [중앙일보, 20-10-29]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획을 그은 5·18의 역사적 의미는 우리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재평가돼 왔다.(생략) 관련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명예훼손죄 등 기존 형법으로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주당은 이번 정기국회 내에 5·18 특별법을 통과시킬 방침이다. 야당이 반대할 경우 단독으로 강행할 의사도 내비쳤다. 5·18을 앞세워 역사 해석을 독점하겠다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고질적 편 가르기도 걱정된다. 박근혜 정권의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초래한 사회 전반의 후폭풍을 벌써 망각했는지 의심케 할 정도다. 특히 이번에는 ‘정부의 발표·조사를 통해 명백한 사실로 확인된 부분’에 대해 허위 사실을 유포할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여당은 가짜뉴스 엄단을 표방하지만 학문·예술·언론 행위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 5·18 왜곡 특별법은 지난 20대 국회 때도 발의됐다가 위헌 논란 등으로 폐기됐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학계의 토론과 검증, 시민사회의 자정 기능에 맡기는 게 마땅하다.
[단독]"5·18은 끝났다" 5·18 겪은 철학자의 '5·18법 저격시' [중앙일보, 20-12-11]
“지금 나는 5.18을 저주하고 5.18을 모욕한다. 그 잘난 5.18들은 5.18이 아니었다. 나는 속았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11일 페이스북 게시글에 올린 시 ‘나는 5.18을 왜곡한다’의 내용 중 일부다. 그는 지난 9일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5.18역사왜곡처벌법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시를 썼다. 최 교수는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자기 확신에 도취돼 역사 퇴행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는 법안”이라며 “5.18역사왜곡처벌법을 넘어 그 연장선상에서 전체주의적 독재의 길을 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광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0년 5월 광주에서 21살의 나이로 5.18민주화운동을 겪었다.
최 교수는 시를 통해 5.18역사왜곡처벌법을 처리한 민주당을 5·18에 비유해 “5.18아 배불리 먹고 최소 20년은 권세를 누리거라. 부귀영화에 빠지거라. 민주고 자유고 다 헛소리가 됐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안을 비판하는 문구로 시를 끝맺었다. “5.18역사왜곡처벌법에 21살의 내 5.18은 뺏기기 싫어.”
최 교수는 5·18역사왜곡처벌법에 대해 “토론과 대화를 제약하는 법안이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를 매우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법안”으로 규정했다. 그러면서 “독재의 길을 닮아가고 있다. 시를 통해 5.18이 전두환을 닮을 줄 몰랐다고 표현했단 게 이런 의미”라고 말했다.
5.18 역사왜곡처벌법, 국가보안법을 소환하다 [프레시안, 20-12-12]
민주당은 5.18 역사왜곡처벌법 제정의 이유로 '잘못된 역사인식의 전파와 국론분열의 방지'를 들고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유들이다. 국가가 전면에 나서 '다른 역사인식'을 '잘못된 역사인식'으로 규정하고 이를 국론을 분열시키는 사회해악적인 범죄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법이 지난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이후, 보수세력은 천안함 사건이나 6.25 왜곡에 대해서도 처벌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한국사회에는 이와 유사한 법률이 이미 있다. 국가보안법이다. 과거사나 역사인식을 직접 규율하는 법률은 아니지만, 북한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에 '다른 인식'을 퍼뜨릴 시에는 국가보안법의 찬양고무죄로 처벌해왔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5.18의 역사적 진실과 국가폭력의 문제를 한국사회에 알리는 과정 자체가 국가보안법과의 투쟁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하고 사회질서의 혼란을 조성할 허위사실을 날조하거나 유포한 자를 처벌'하겠다는 국가보안법에 맞서 정치사상의 자유, 비판의 자유를 옹호하며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회복을 위한 투쟁이 5.18 운동이었다. 그런데 5.18에 대해 부인, 비방할 경우 형사처벌을 하겠다는, 국가보안법과 동일한 논리구조를 지닌 법이 5.18의 이름으로 제정되려는 것이다. “역사왜곡이 아이들 역사관 형성에 악영향을 미치고 나라의 정체성을 흔드는 정신적 내란죄”라며 5.18 역사왜곡처벌법을 옹호하는 민주당 양향자 의원의 발언에 참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5.18 역사왜곡처벌법에 대한 비판을 찾기 쉽지 않은 이유는 지난해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5.18 망언과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과의 결탁이 준 충격과 함께, 5.18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이 더욱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부터 온라인을 중심으로 퍼지던 5.18에 대한 왜곡과 혐오가 주요 정당의 국회의원을 통해 공언되고 학살 책임자 전두환이 회고록을 출간해 이를 반복하는 상황은 5.18 피해자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폭력이다. 이러한 상황은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에게도 비슷하게 반복된다. 총선과 겹친 세월호 추모 시기가 되면 후보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세월호 피해자에 대한 혐오발언을 쏟아냈다.(생략)
5.18, 세월호 참사에 대한 부인과 왜곡, 피해자들에 대한 혐오행위가 지속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자 회복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5.18은 90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법률'부터 시작해 전두환, 노태우 처벌, 국가유공자 예우, 국가기념일 지정까지 이루어졌지만, 법률에 근거해 조사권한을 부여받은 진상규명 조사위는 2020년에야 겨우 출범했다. 5.18에 대한 국가 차원의 포괄적인 진상규명보고서조차 없는 것이다.(생략)
이번 정기국회 상임위에서 40년 만에 구성된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조사기간을 연장하고, 조사범위도 확대하는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지난 20대 국회 때 개정된 과거사법에 따라 '2기 과거사위'도 새롭게 출범하여 일제강점기 이후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과 조사를 추가로 할 예정이다. 너무나 오래 지연되고 지체되어왔다. 그 시간만큼 피해자들은 차별과 혐오에 고통받아왔다. 이번 진상규명은 과거 국가폭력 사건에 대한 사죄와 반성이 시작될 수 있도록 한국사회의 준거점을 만드는 소중한 작업이 되어야 하며, 진상규명의 목적이 형사처벌의 정당성 확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진상규명보다 형사처벌을 앞세우는 5.18 역사왜곡처벌법은 당장 폐기되어야 한다.
4. 논의 요청
5. 5.18을 보는 다른 시각
① 5·18의 시대적 배경
- 박정희 시기 한국 경제
- 박정희 시기 노동자민중의 삶과 저항
② 5·18까지의 과정
③ 5·18, 어떻게 볼 것인가?
6. 논의 요청
00_220502 5.18 이슈토론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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